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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선지서

이사야 53장 11절 강해,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by 파피루스 2025.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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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한 자의 영혼이 만족하게 되리니

이사야 53장 11절은 고난받는 종,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이 단지 고통과 희생에 머물지 않고, 궁극적인 만족과 구속의 성취로 이어진다는 위대한 결말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본 구절은 종의 수고가 헛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수고로 말미암아 많은 이들이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짐을 강조합니다. 이 말씀은 고난과 영광, 희생과 열매가 서로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깊이 있게 해석하도록 인도합니다.

수고한 자의 영혼이 자기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본문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로 시작됩니다. 이 표현은 고난받는 종이 단지 고통을 당한 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수고의 열매를 직접 목격하고, 만족하게 된다는 놀라운 복음의 선언입니다. 여기서 ‘수고’(עָמָל, amal)는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고통을 동반한 노력, 희생적인 헌신을 의미합니다. 이는 십자가의 고난, 조롱, 채찍질, 침묵, 버림, 죽음 그 모든 과정을 아우르는 단어입니다.

‘영혼’(נֶפֶשׁ, nephesh)은 단지 생명이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 존재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바쳐 속건제물로 드리셨다고 했을 때, 그것은 육체뿐 아니라 존재 전체를 드린 희생이었습니다. 그 희생을 통해 구속의 길이 열렸고, 이제 그 결과를 보고 만족하게 되셨다는 것이 이 말씀의 본질입니다.

‘만족하게 여긴다’(יִשְׂבָּע, yisba’)는 히브리어로 포만감, 충족, 기쁨, 안정감을 표현합니다. 고난의 길을 걸은 자가 자신의 수고의 결과를 볼 때 얻게 되는 깊은 영혼의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그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아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아버지께 기도하실 때,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고백하십니다. 그 일은 구속이고, 그 구속은 고난의 수고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만족은 단지 어떤 성취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데서 오는 구속적 성취의 기쁨입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이 결코 불완전하거나 불확실한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보여주는 복음의 기초이기도 합니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이 구절은 고난받는 종의 정체성과 그 사역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그는 ‘의로운 종’(צַדִּיק עַבְדִּי, tsaddiq avdi)이라 불립니다. 여기서 ‘의로운’은 도덕적 무결함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언약의 신실함과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하는 종의 성품을 나타냅니다. 그는 죄를 짓지 않으셨고, 입에 괴사가 없으셨으며, 모든 면에서 의로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 의로운 종이셨습니다.

그는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합니다. 여기서 ‘지식’(דַּעַת, da‘at)은 단순한 정보나 학문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체험적으로 얻는 깊은 통찰과 순종을 포함한 개념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아셨고, 아버지의 뜻을 알고 철저히 그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바로 그 순종의 지식이 의를 낳았습니다. 빌립보서 2장 8절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합니다. 이 순종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길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라는 구절은 복음의 확장성과 대속의 보편성을 보여줍니다. ‘많은 사람’은 단순한 수적 개념이 아니라, 모든 족속과 나라와 언어에서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특정 민족이나 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었습니다.

‘의롭게 하다’(יַצְדִּיק, yatstiq)는 법정적 언어로, 죄인이 무죄하다고 선언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인간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은 선언적 의입니다. 로마서 5장 1절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라고 선언합니다. 이 선언은 바로 고난받는 종의 수고와 지식, 순종으로 인해 가능해진 은혜의 선언입니다.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이 문장의 마지막 절정은 고난받는 종이 의를 가져오실 뿐만 아니라, 그 의를 이루는 방식이 죄악을 ‘담당함’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담당하다’(יִסְבֹּל, yisbol)는 짐을 지다, 짊어지다, 대신하다의 의미로, 희생 제사와 깊이 관련된 표현입니다. 이는 죄인들이 받아야 할 형벌과 짐을 고난받는 종이 대신 지고, 대신 심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6절과도 연결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기서 다시 한번 종의 자발적인 담당이 강조됩니다. 이는 히브리서 9장과 10장에서 계속해서 강조되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의 제사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으며, 더 이상 반복적인 제사가 필요 없게 하셨습니다.

이 대속의 진리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단지 하나님의 선언 때문만이 아니라, 그 선언이 근거하는 실제적인 대속, 곧 예수님의 죄 짊어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리 죄를 지셨기에, 우리는 죄 없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값싼 용서가 아니라, 대가가 치러진 은혜입니다. 이는 우리가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는 복음의 무게입니다.

결론

이사야 53장 11절은 고난받는 종의 수고가 어떻게 열매로 나타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수고롭게 내어주셨고, 그 수고를 보고 만족하게 되셨습니다. 그 만족은 곧 많은 사람들을 의롭게 하는 열매로 나타났고, 그 방식은 그들의 죄를 친히 담당하는 대속의 희생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감당하신 고난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음을 통하여 생명을 낳으셨고, 부끄러움을 통하여 영광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수고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이 놀라운 사실은, 누군가가 죄를 대신 지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 복음의 진리를 다시 마음에 새기며, 그 은혜에 합당한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만족이 우리의 삶 속에서도 온전히 드러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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