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와 계획 –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종교 권력
마가복음 14장은 고난주간의 마지막 절정을 향해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1절과 2절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모의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시작합니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여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기 위한 계략을 은밀히 꾸미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속사의 신비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 되신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앞두고 죽임당하실 계획은 단순히 사람의 악한 음모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날이며, 어린양의 피로 장자의 죽음을 면한 구원의 날입니다. 예수님은 그 유월절의 실체이자 성취로 오신 참된 어린양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절기에 맞추어 죽임을 당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 속에서 철저하게 예정된 시간이며, 인간의 죄와 악함조차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악한 계획은 은밀하고 계산적이지만, 그들이 모르는 사실은 그들의 음모 속에 하나님의 완전한 뜻이 숨어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인류 구원의 시작이며, 그분의 고난은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인 – 구속사에 동참한 사랑
3절부터 9절까지는 베다니에서의 아름다운 사건이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막 14:3). 이 장면은 대조적으로 앞선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와는 전혀 다른, 구속사에 참여한 한 여인의 신실한 사랑과 헌신을 보여줍니다.
이 여인은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그 행위는 복음서 전체를 통해 깊은 감동을 줍니다. 순전한 나드 향유는 노동자의 1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귀한 물건으로, 그것을 아낌없이 부어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헌신을 보여줍니다. 당시 문화에서는 생존한 사람에게 장례의 의식을 미리 행하는 일은 이례적인 일이며, 불경스럽게 여겨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다가올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직감하고, 그분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제자들과 몇 사람은 이 행동을 비난하며 “왜 허비하느냐”(막 14:4)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녀의 행동을 칭찬하십니다.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막 14:8).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 누군가가 그 의미를 알아주고, 사랑으로 준비해 주었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으신 듯 보입니다.
이 여인은 구속사의 한 장면에 이름 없이 참여했지만, 그녀의 행동은 영원히 복음과 함께 전해질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대로(막 14:9), 오늘날까지도 신자들에게 큰 도전과 감동을 줍니다. 이처럼 참된 사랑과 헌신은 때로 이름도 없이 조용히 드려지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결코 잊히지 않는 거룩한 행위가 됩니다.
유다의 배신 – 은삼십의 거래와 구속사의 길
10절과 11절은 예수님의 수제자 중 한 명인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과의 거래를 통해 예수님을 팔기로 결심하는 장면입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이 장면은 너무도 비극적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3년을 동고동락했던 제자가, 세상의 탐욕과 자기 기대의 실망 속에 스승을 팔아넘기게 됩니다. 유다의 배신은 전적으로 그의 자유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며, 동시에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사건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메시아가 은 삼십에 팔릴 것을 예언하였고(슥 11:12-13), 이는 예수님의 죽음조차도 하나님의 구속 계획 가운데 철저히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구속사의 깊이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연이나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하신 길이며, 인류의 죄를 위한 속죄의 제사였습니다. 가룟 유다의 어두운 선택조차도 하나님께서는 구속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수단으로 사용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다의 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주님을 가까이에서 보고도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멸망의 길로 나아간 인물입니다. 고난주간을 보내며 우리는 유다의 모습을 통해, 겉으로 신앙인처럼 살아가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이용하고자 하는 내면의 유혹을 경계해야 합니다. 구속사에 동참한다는 것은 단지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르고 헌신하는 삶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마무리
마가복음 14:1-11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둘러싼 사람들의 상반된 태도를 통해, 구속사의 신비와 하나님의 뜻을 드러냅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 한 여인의 향유, 그리고 유다의 배신은 모두 예수님의 고난을 중심으로 서로 대조를 이루며, 각 인물이 구속사의 흐름에 어떻게 참여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실패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 속에서 준비된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 고난을 묵상하며 다시금 결단해야 할 것은, 이름 없이 옥합을 깨뜨린 여인처럼, 순전한 사랑과 헌신으로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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