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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존스, 부흥에 대한 갈망 (수4:21-24) -

by 파피루스 2021.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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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존스의 부흥 - 제8장

[이 글은 마틴 로이드존스의 부흥 연속 설교의 8번째 설교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 가로되 후일에 너희 자손이 그 아비에게 묻기를 이 돌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자손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수4:21-24)

우리는 이제까지 부흥의 길을 막는 여러 장애물들과 방해 요소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우리가 필연적으로 이 문제부터 시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비록 우리가 이 문제부터 생각하고 지켜야 하는 어떠한 조건들과 원칙들이 있음을 인식했다 할지라도, 여기에만 머문다면 불충분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면 절망으로 끝을 맺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고 우리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진실로 알게 되면, 진정한 난제는 우리 인간이 가진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임을 틀림없이 알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여러 활동과 조직을 통해서 바쁘고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일을 멈추기까지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사람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가 이제 이 전체 주제를 명확하게, 보다 더 직접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즐거워해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에게 상기시켜드립니다. 즉 부흥이 필요하다는 바로 이 문제는 기독교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므로, 전 세계에 걸친 그리스도인들의 생각과 기도들이 통로가 되어 이 긴박한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지난 19세기의 유명한 성경 강해자 알버트 반즈가 한 말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제가 볼 때 이 문제를 아주 완벽하게 지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 전체가 한 덩어리가 되어 부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것을 간절히 바라게 되는 그 날은 교회사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며, 오순절에 나타난 것과 같은 능력이 나타남을 예고하는 날이 될 것이다.” 저는 그의 말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합니다. 오늘날 교회에 속한 우리들에게 닥친 가장 큰 난제는 신앙을 고백하는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부흥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부흥을 갈망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제가 지적했듯이 부흥의 주제가 거의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방면에 너무 바쁜 나머지, 부흥에 대해서 생각할 틈을 얻지 못합니다. 부흥을 위해서 긴급하게 기도하는 일은 더더욱 드뭅니다. 그러나 알버트 반즈가 말하듯이 우리가 부흥을 위해 긴급하게 기도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흥을 위해 돕는 것은 그 무엇이든지 가장 큰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방면에서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 중 하나는 과거의 위대한 부흥을 생각해 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1859년에 일어났던 일을 상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1859년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에 대해 분명히 합시다. 우리는 단순히 역사적인 입장에서만 이러한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관심이 단순히 골동품 수집가의 관심과 같아서는 안 됩니다. 단순히 이야기 속에 나타난 역사를 읽기 위해서 부흥에 관한 이야기를 읽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동기와 관심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생각하고 연구하며 읽어봄으로써 이러한 일을 뒷받침하고 있는 위대한 원리들을 발견해 내는 것, 다른 말로해서 오늘날 우리 세대에서 구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해 내는 것입니다.


그 동기는 골동품 수집가적인 취미나 동기보다 실제적으로 우리를 지배해야 합니다. 즉 우리가 발견해 낼 수 있는 것 중에서 100년 전에 일어났던 일에 대하여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는 것은 무엇이든지 활용하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요단강 가운데서 취하여 길갈에 세워 놓으라고 명하셨던 열두 돌을 이용하게 하신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제가 이 흥미로운 사건에 여러분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은, 그것이 바로 이 시간 우리에게 매우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비상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상하고 기이하며 신기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 먼저 이스라엘 사람들의 원수인 애굽 사람들에게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건져내셨습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마른땅으로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게 했습니다. 요단강 저편에 약속된 가나안 땅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곳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된 땅이었습니다. 광야와 얼마나 큰 대조를 이룹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그 강을 건널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대답은 하나님께서 요단강 물을 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건넜습니다. 다시 그들은 마른땅으로 건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기억하다시피 하나님께서는 이 명령을 여호수아에게 내리셨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명령을 또 백성들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제사장들은 법궤를 메고 선 그 자리에서 열두 돌을 취하라. 열두 돌을 취하여 그것을 길갈에 세워 두라.” 어째서 그랬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제가 볼 때 1859년에 일어난 부흥 사건을 기념하는 일은 길갈에 세워 두었던 열두 돌을 기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입장은 그러합니다. 우리가 이 주제를 연구해 나감에 따라서 제가 할 일은 어떤 의미에서 여러분 속에서 바로 이러한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이 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신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 책과 팜플렛은 무엇입니까? 이 모임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것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유대백성들이 “이 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물었듯이, 우리의 연구의 주된 성과는 우리 시대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것이 무엇이며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이 본문을 생각해 봅시다. 물론 단번에 떠오르는 생각은, 이러한 유의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은 매우 특이하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이와 같은 사건을 이스라엘 자손들 중 어느 세대에게도 다시 상기 시켜 줄 필요가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 사건들은 너무나 괄목할 만한 사건들이었습니다. 그 두 사건, 즉 홍해와 요단강을 건넌 사건들은 너무나 특별한 사건들이었기 때문에, 어떤 눈에 보이는 외적인 표증을 통해 그러한 것들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킬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본성을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쉽게 잊어버리는가를 하나님께서 그토록 잘 아시는 것이 정말 놀라울 뿐입니다. 이와 같이 기념할 만한 사건들이라 할지라도, 후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과 의식 속에서 망각되고 지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돌들을 취하라, 그리하여 그 돌들을 보고 생각나게 하라, 사람들이 이 돌들이 무엇이냐? 이 돌들은 무엇을 뜻하느냐? 라고 물을 때에 그들에게 대답해 주어라.” 이 망각하기 쉬운 성향이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 가장 우선적인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크고 놀라운 일들이라도 쉽게 망각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모든 영역에 있어서 이것은 사실입니다. 제가 모든 것을 분석해 본 결과 죄가 가져온 가장 강력한 영향 중 하나는 생각의 기능을 마비시키고 기억을 흐려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의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영역에서 그러합니다.


우리는 위대한 사람들을 얼마나 쉽게 잊어버립니까! 자기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들도, 그 뒤에 오는 세대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그런데 후대 사람들이 갑자기 어느 기념비를 보게 되면 “저 사람이 누군가? 그가 무슨 일을 했는가?”라고 말합니다. 비록 이 사람들이 자기 세대에 뛰어난 일을 했고, 그 당대 사람들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으로 추앙했다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고 다른 세대가 오면 그 걸출했던 인물들도 망각의 그늘 속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왕이 일어나서”(출1:8)


이런 의미에서 사람들로부터 받는 평판처럼 덧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위대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사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 속에서 가장 걸출한 사건들도 금방 잊혀 집니다. 한 세대가 일어나면 그 세대의 선조들이 이룩했던 업적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 선조들은 어떤 위대한 원리나 위대한 자유를 위해서 죽기까지 투쟁했는데도 말입니다. 그 일에 대해서 전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세대들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모든 열매를 따고 모든 혜택을 누립니다. 그들은 “이러한 것들이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왔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 본성이 아닙니까? 그러면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이며, 특히 종교적인 영역에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째서 하나님께서 이 돌들에 대해서 명령을 내리셔야 할 정도로, 이와 같은 일들을 망각하는 세대들이 일어날 수 잇느냐 하는 말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몇 가지 답변을 간단하게 제시하려 합니다.


아마 주요한 원인은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의 세대에 몰두하기 때문이며, 특히 우리 자신의 활동에 몰두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자기중심적이고 자신의 일에 너무 바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과거에 이와 같은 유의 세상에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말입니다. 병적일 정도로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만을 바라봅니다. 사람들의 삶은 자기 자신의 범주에만 국한되어 있고, 그 범주를 벗어나 밖을 바라보는 데는 매우 인색합니다. 다양한 종류의 칸막이들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철, 대나무 등으로 된 칸막이들이 있어 왔습니다. 인생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좁은지 안다면 놀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좁은 영역에 국한되어 제한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밖을 내다보지 않습니다. 다른 것은 전혀 의식하지 않습니다.


물론 여기에 덧붙여서, 특히 어떤 생각이 오늘날의 특징을 이루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곧 과거는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진보하였고, 놀라운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기술과 기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과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삶을 주도할 주인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과거가 우리에게 말해 줄 것이 무엇이 있느냐는 생각이 대단히 만연해 있습니다.


물론 우리보다 앞선 모든 세대도 그러했습니다. 우리 뒤에 오는 세대도 역시 그러한 생각을 가질 것입니다. 그 뒤에 오는 세대들이 돌이켜 우리를 바라본다 해도 곧 잊어버릴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있어서 우리는 신출내기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따져 볼 때 그 이유는 우리 자신의 주관주의 때문이라고 거듭 말씀 드립니다. 이 주관주의가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면에 있어서도 우리를 장악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난제에 대해 병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나머지, 성경도 그런 자세로 접근해 나갑니다. 즉 성경은 우리 자신의 문제에 도움을 주는 책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도움을 원합니다. 이런저런 도움을 원하여 성경으로 나아갑니다. 마치 성경이 “영혼의 볼거리와 홍역”을 치료하는 시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을 접하는 우리의 자세가 객관적이지 못하고 너무 주관적입니다. 나 자신에게 “나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 알기 위해서 성경을 읽으려 한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행하시고 관여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위해 성경을 읽으려 한다”고 말하면서 성경에 접근하는 일이 얼마나 됩니까?


그러나 성경은 나의 작은 문제들에 대해서 대답해 주는 정도의 책이 아닙니다. 또는 내가 알고 싶어하는 여러 가지 것들을 말해 주는 책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저는 그것을 살펴보려 합니다. 뒤로 물러서서 주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보려고 합니다.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기억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수4:24)


하나님의 역사들. 그러나 우리가 더 이상 그러한 방식으로 성경을 읽지 않는 것이 무섭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저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작은 말을 원합니다.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서 그저 멋진 사색을 원합니다. 그저 무엇인가를 원하고 간단한 기도를 서둘러 드린 후에 황급히 돌진하여 나갑니다.


멋진 사색. 제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하는 말을 심각하게 오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실로 오늘날 복음적인 대다수의 사람들의 주된 문제는 성경을 지나치게 경건하게 읽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너무 주관적으로만 읽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 놀라운 역사들의 파노라마는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나치면서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몇 개의 돌을 취하여 그것을 기념으로 삼고 주의를 끌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원리입니다. 예를 들어, 성찬식을 살펴보십시오. 정확히 그 원리가 똑같습니다. 죄의 결과로 우리는 매우 둔하고 무딥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과 그의 고뇌와 그의 수치와 십자가에서 당하신 모든 것을 잊기가 쉽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그의 영원한 사랑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친히 성례를 제정하고 명하심으로써 함께 모여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시게 하셨습니다.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길갈에 돌을 세운 것도 역시 이런 유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깊은 영적 무기력으로 인해서 많은 고통을 당하므로, 객관적인 기념물이 필요합니다. 우리 밖에 있는 것, 다시 말하면 우리로 하여금 “이 성찬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돌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묻게 만드는 기념물을 부단히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하감하시고 우리의 무기력과 우둔함을 아시고, 하나님의 능력 있는 행사와 역사를 기념할 만한 외적인 표증을 주셨습니다. 그 한 예로 1959년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즉 100주년을 맞아 1859년에 일어났던 일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요점을 붙잡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우리는 이 부흥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는 과정에서 여덟 번째 항목을 지금 살펴보고 있습니다. 만일 지금까지 제가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묻게 하지 못했다면, 여러분 속에 이러한 새로운 관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면, 지금까지 다루어 온 모든 것은 다 허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연구해 보고 무엇인가 느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 기록은 도대체 무엇을 뜻합니까?” 라고 묻는 데까지 진정한 관심을 기울입니까?


진정하고 완벽한 대답이 바로 이 여호수아 4장 마지막 부분 몇 구절 속에 들어 있음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 모든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그렇게 하신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저는 여러분 앞에 바로 그것만을 제시할 뿐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그것은 사실들을 상기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 이 돌들은 무엇인가?” 후대에 오는 세대들이 이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 그들은 우연히 거기를 오갈 것입니다. 또는 여행을 하거나 길을 걸어가다가 거기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갑자기 열두 돌이 거기에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가로 물어 볼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말했습니다. “이 돌들이 여기에 있는 것은, 전에 일어났던 일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역사이지 이론이 아닙니다. 사실이지 관념이 아닙니다. 떡과 포도주는 무엇을 뜻합니까? 사실을 뜻합니다. - 그리스도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의 전체 입장은 바로 그러한 사실들에 달려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머물러 바로 그 문제만을 다룰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사실들을 떼어내 버리고 교훈만을 붙잡을 수 있다고 믿게 하는 아주 교활한 신학적 교훈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거짓말입니다! “이 돌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실들을 의미합니다.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널 때에 이적적인 방법으로 건넜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사실, 하나님이 행하신 사실들을 뜻합니다.


우리가 금년 1959년에 기념하고 있는 일도 역시 그와 같은 일입니다. 100년 전에 일어났던 그 기이하고 놀라운 일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1859년에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일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신문에도 보도되었습니다. 신문 기자들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면 기사화하는 일이 매우 드뭅니다. 그들이 관심을 갖는 유일한 설교는, 어떤 행태로든 정치적인 문제를 거론하는 설교입니다. 그들은 영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1859년에 일어났던 일을 그들은 실제로 기사화했습니다. 그것이 첫 페이지의 뉴스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실제로 나타난 현상이었습니다.! 사실이요, 役事였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역사의 영역에 속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 본문에서 설명해 주는 바와 같이, 그것은 오직 한 번 일어났던 어떤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마른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이 요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1859년에 일어났던 일은 위대한 시리즈의 한 단편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한 실례에 불과합니다. 즉 계속되는 여러 세기에 걸친 교회의 역사 속에서 때때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한 예증입니다. 바로 우리가 “부흥”, “신앙 부흥”이라고 부르는 것의 한 예증입니다. 그것도 오직 하나의 예증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흥을 예증하는 사건들은 그밖에도 많이 있습니다.


저는 말이 난 김에 몇 가지 실례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종교 개혁이 있기 오래 전에 존 위클리프와 롤라즈라는 사람이 관련된 종교적인 부흥이 영국에서 일어났습니다. 1859년에 일어났던 것과 똑같이 현격한 부흥이었습니다. 물론 존 후스라는 위대한 사람이 관련된 종교적 부흥이 유럽 대륙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지금은 체코슬로키아라고 부르는 모라비아에서도 참된 부흥이 일어났는데, 이는 모라비아교도와 관련하여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구와 통로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기이한 역사가 있었습니다. 북이탈리아의 발도파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참된 부흥이었습니다. 또 존 타울러 라는 위대한 사람과 관련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 사람은 사실상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제였고 설교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그에게 임하셨고 그 결과 그 지역에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것도 역시 똑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종교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종교 개혁일 뿐만 아니라 부흥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 개혁을 단순한 신학적인 운동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신학적인 운동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덧붙여 부흥, 하나님의 성령이 물 붓듯 부어지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를 듣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설교하고 성경을 읽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종교적인 각성이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부흥의 의미는 이러한 것입니다. 17세기에도 이러한 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00여 년 전에 휘트필드나 웨슬리 형제나 다른 많은 사람들이 관련된 위대한 복음주의적 각성이 일어났습니다. 또 18세기 말엽이나 19세기초에도 역시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 다음 1857년-1859년에 미국과 북아일랜드와 웨일즈와 스코틀랜드와 스웨덴과 세계의 여러 다른 지역에서 이 주목할 만하고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기독교의 오랜 역사에 걸쳐 간간이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 속에 포함되는 한 사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부흥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어보면 그러한 일들에 어떠한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보편적으로 동일한 특징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단강에서 행하신 일은 그전에 홍해에서 행하신 일과 똑같다고 여호수아는 말했습니다. 어떤 보편적인 특징들이 이러한 모든 체험들에 모두 들어 있습니다. 시대나 나라나 문명의 정도나 다른 모든 것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100년 전에는 어떠한 일이 있었습니까? 이러한 일련의 공통적인 특징을 가진 사건들에 포함되는 그 100년 전의 사건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부흥입니까? 우리는 그것을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교회 생활에 비상한 축복과 생동감이 넘치던 시기라고 말입니다. 물론 정의상 일차적으로 부흥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 신자들 속에서 먼저 일어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정의상 맞습니다. 이것이 부흥입니다. 어떤 것이 새롭게 되살아납니다. 이 말은 어떤 것이 생명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생명이 약해지고 쇠퇴하기 시작하더니, 거의 다 죽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죽었다. 그것은 다 끝났다.” 왜냐하면 생명과 활동의 표증이 전혀 나타나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흥은 그 생명을 깨우고 고무시켜 다시 표면에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교회에서 일어나며, 신자들 속에서 일어납니다. 또 심지어 그것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줍니다.


자, 이점이 바로 가장 중요한 요점입니다. 왜냐하면 이 정의는 부흥과 복음 전도 운동을 구분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를 혼돈하면 많은 해를 입습니다. 자기들이 부흥을 일으키고 있다고 공포하는 사람들처럼 어리석은 자들도 없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복음 전도 운동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혼란은 찰스 피니에 의해서 도입되었고, 그 이후로 계속 존재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목적을 분별치 못하는 혼동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그 차이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복음 전도운동은 교회가 밖에 있는 자들에 대해서 어떠한 일을 하기로 결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부흥은 교회가 어떠한 일을 하기로 결정하고 그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흥은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이요, 교회를 위해 일어나는 일입니다. 두 가지 일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큰 복음 전도 운동을 벌이면서도 교회가 여전히 동일한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더 나빠지지 않을지라도 말입니다. 저는 교회가 소위 “복음 전도 운동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는 말과, 그 운동의 결과로 기도 모임이나 교회의 정규 집회에 잘 참석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을 끊임없이 듣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을 덧붙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러한 활동을 자극하는 다른 여러 기관들에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 운동은 주로 밖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것입니다. 그러나 부흥의 진수는 그것이 교회에서 일어나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영향을 받고 감동을 받아 엄청난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어나는 일은 무엇입니까? 이 돌들은 무엇을 뜻합니까? 이 여러 나라에서 100년 전에 어떠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 질문에 대답하는 가장 좋은 길은, 부흥은 어떤 의미에서 오순절의 반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뒤를 돌아보면서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오순절에 일어났던 일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일이 교회에 일어났는데 , 그것이 바로 부흥이 라는 것입니다. 저는 부흥의 보편적인 몇 가지 특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부흥의 진수는 성령께서 함께 모인 사람들 위에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즉 교회 전체에, 또는 다수의 교회들에, 어느 지역이나 혹은 한 나라에 임하시는 것입니다. 부흥은 바로 이러한 것을 뜻합니다.


부흥이란 성령의 임재하심, 또는 흔히 사용되는 다른 용어로 말하자면 성령의 부어 주심입니다. 이 용어들은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도 알다시피 사람들은 그 일이 갑자기 자기들에 임하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들 중에 임하시며, 하나님께서 임하사 그들 가운데 계십니다. 세례, 부어주심, 찾아오심이 그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갑자기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의식하되, 전에 알지 못했던 방식으로 의식하게 됩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 그전에도 여러 번 그랬듯이, 함께 모인 교회의 구성원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갑자기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 그전에도 여러 번 그랬듯이 함께 모인 교회의 구성원들에 대서서 말하는 것입니다. 갑자기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합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에 대한 경외심을 느끼게 됩니다. 성령께서 문자 그대로 그 집회를 관장하시고 이끌어 가시며 그 능력을 나타내시고 그들을 주도하시되 인도하시고 지도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의 진수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기록으로 남아있는 모든 부흥의 사건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보편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부흥의 즉각적인 효과는 거기 있는 사람들이 영적인 것을 의식하기 시작하며, 전에는 전혀 갖지 못했던 영에 대한 분명한 관점을 갖기 시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다시 저는 신자들, 교회의 구성원들이 이 임재와 능력을 갑자기 의식하게 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에 그러한 것들에 대서 들어 왔습니다. 수천 번 이상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이렇게 간증합니다. “ 아 글쎄 갑자기 그 모든 것이 내게 분명하게 보이게 되었어요. 갑자기 조명을 받아서 이제까지 내가 익히 알고 있던 것들이 마치 황금 글자처럼 두드러져 보였어요. 저는 이제 알겠어요.”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밝히고 총명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들은 이제 그것을 분명히 알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그 능력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깨닫게 되었다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으면서,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갑자기 인식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주목해 보셨습니까? 그들은 욥처럼 입을 막습니다. 또는 이사야와 같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때 어떠한 일이 일어났기에 그렇게 말합니까? 그들은 방금 하나님의 거룩과 위엄과 영광을 인식하였습니다. 부흥이 일어날 때는 언제나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복음 전도 운동이 벌어질 때는 언제나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복음 전도 운동의 경우에는 크게 웃거나 경박스러운 요소가 있을 수도 있고, 분명한 조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흥이 일어날 때는 결코 그런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경외심, 거룩한 두려움을 갖게 되며,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과 거룩과 완전한 정결함을 의식하게 되는 일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 다음에는 필연적으로 무섭고 깊은 죄의식을 갖게 되고 무서운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비열하고 부정하며 전적으로 가치가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 대면할 때 자신들은 매우 무능한 존재들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아니면, 우리 주님께서 비유에서 묘사하신 세리처럼 이 모든 것을 의식한 나머지 얼굴을 들 수조차 없게 됩니다. 그들은 거의 문 뒤까지 물러나가 가슴을 치면서 “오, 저는 죄인이오니 하나님이시여, 긍휼을 베푸소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거룩, 자기 자신의 전적인 죄악성과 곤고함, 자기 자신의 무가치함, 등 이제 그전에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것들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그전에는 자기들이 대단한 일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자기들이 한일이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안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처럼 그것을 분토와 더러운 쓰레기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전적인 무능함과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에 자신들을 내 맡깁니다.

성경에 보면 항상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스스로 그러한 기사들을 읽어보십시오, 성경 어디를 읽든지 그것을 발견하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그 상황을 주관하시는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시는 역사입니다. 사람들은 어느 기간 동안 그러한 상태에 사로 잡혀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몇 시간 동안만 그러한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날, 여러 주간, 심지어 여러 달 동안 그러한 상태에 처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 빠집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분명한 관점과 주 예수 그리스도, 특히 십자가에 의한 그의 죽으심에 대해 분명한 관점을 갖게 됩니다. 결국 그들은 그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항상 이론적으로 그것을 믿어 왔고 그래서 성찬식에도 참여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것도 느끼지 못했으며, 그 성찬식이 그들에게도 전정한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물론 그것을 믿었습니다. 진실로 그것을 신뢰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의 능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 녹아지고 깨어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자기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알고, 더 나아가서 사랑과 기쁨, 곧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는 말씀을 깨달을 때 알게 되는 그 사랑과 기쁨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모든 것이 그들에게 적나라하게 인식되었고,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들을 사랑하사 자기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과 관계되는 문제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가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 그리고 나의 죄는 용서 받았다.” 그들의 마음속에 평화가 찾아들고, 기쁨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랑에 겨워 어쩔 줄 모릅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찬미하는 일에 온 정신을 몰두합니다. 이것이 이제 그들을 전적으로 사로잡는 것이 되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누구를 만나게 되면 즉시 그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그것을 얘기합니다. 그것이 대화의 주요 초점이며, 유일한 관심입니다. 그들은 이제 함께 모여 이것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모여 집회 열기를 희망합니다. 그들은 매일 밤 모여 이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미하고, 찬송하며 그 영광을 노래합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기도합니다. 그 기도회는 금방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가는 줄 모르고,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계속합니다. 그들은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어서 일이 끝나는 시간만을 고대합니다. 물론 밖에서 이것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갖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 책들 속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요소들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가족에게도 관심을 갖게 됩니다. 아내, 남편, 아버지, 어머니, 자녀들, 형제들, 자매들, 등 자신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줄 알지 못하는 가족들에게도 큰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들은 그것에 대해 가족들에게 말해주며, 그렇게 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들을 강권하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에 대해서 친구들과 만나는 사람들에게 다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기도는 부흥의 때마다 나타났던 위대한 특징입니다. 큰 기도 집회가 있고 여러 시간 동안 중보 기도가 진행됩니다. 그들은 이름을 불러가면서 이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탄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놓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상할 정도의 긴박감을 갖고 이 일에 전념합니다.


이 모든 일들을 듣고 그처럼 오랫동안 알았던 사람들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보고서 밖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집회에 참석하며 이렇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래서 그들은 거기에 와 봅니다. 그리고 거기에 와서 동일한 체험을 합니다. 그래서 수천의 사람들이 계속 회심하기에 이릅니다. 실로 전체 이웃들이 성령에 충만한 것처럼 보입니다. 성령께서 어느 곳에나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은 여러 집회에서 회심할 뿐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그 집회에 도착하기도 전에 집회를 향해 가는 길목에서 회심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하면서, 탄광 속에서, 산꼭대기에서 회심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밤중에 깨어 일어나서 영적 각성을 받기도 합니다. 보통 때와 똑같은 느낌으로 잠자리에 들었지만 깨었을 때는 무서운 죄의식을 갖게 되고, 그래서 일어나 하나님께 기도하며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탄원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 순간에는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 역사하시는 이는 하나님의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전체상황을 주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충만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의 때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즉 큰 죄의식과 큰 기쁨과 주님에 대한 경외심과 감사와 찬양이 이상하고 신비롭게 어울리게 됩니다. 부흥의 때에는 어떤 사람이 말했듯이 하나님이 주신 일종의 무질서가 있게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은 울부짖으며 죄책감에 흐느끼고 고민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큰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그리하여 이 모든 것들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오랜 시간 동안 집회를 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시간을 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영원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보입니다. 저녁 6시 30분에 집회를 시작하여 다음날 아침이 밝기까지 끝나지 않고 어느 누구도 시간 가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중간에 한두 번 커피를 마시는 일도 없습니다. 성령께서 이러한 일들을 주도할 때는 시간이나 육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은 다 잊어버립니다.


그러므로 부흥이란 땅 위에 임한 하늘의 날들을 뜻합니다. 이러한 부흥 또는 성령의 임재 하심이 있었을 때 어떤 마을에 있었던 일을 글로 기록해 놓은 것을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그것은 1735년에 매사추세츠 주의 노샘프턴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일인데, 저 위대하고 경건한 조나단 에드워즈가 기록한 것입니다.


이 역사는 금방 그 마을을 영광스럽게 바꾸어 놓았다. 부흥이 일어난 후 맞는 봄과 여름에 그 마을은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한 것처럼 보였다. 그전에는 그 때처럼 사랑이 충만하거나, 기쁨이 충만하거나, 비통함으로 충만한 적이 없었다. 거의 모든 집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주목할 만한 표증이 보였다. 식구들마다 자기들에게 찾아온 구원으로 인해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새로 태어난 것을 즐거워하고 남편들은 아내가 새로 태어난 것을, 아내들은 남편이 새로 태어난 것을 기뻐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행하심이 그의 성소에서 드러났다. 하나님의 날은 기쁨의 날이었고, 그의 장막은 온화했다. 공적으로 모이는 모임은 아름다웠다. 회중들은 하나님께 살아있는 예배를 드렸다. 누구나 진지하게 공 예배에 전념했다. 거기에 참석한 회중은 누구나 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열심히 들었다.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면 때때로 눈물을 흘리곤 했다. 어떤 사람들은 슬픔에 비통해 울었고, 어떤 사람들은 기쁨과 사랑에 겨워 울었고, 어떤 사람들은 자기 이웃들의 영혼에 대한 연민과 관심을 울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1840)


이렇게 해서 부흥 시에 일어나는 일들을 대충 개괄적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이 돌들은 무엇을 뜻하는가?” 100여 년 전에 여러 나라들에서 바로 그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 하심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그 일에 관심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 일로 감동 받았습니까?


만일 오늘날도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이것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리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땅 위에 임한 하늘의 때요, 교회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주도적 사역이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이른바 한량없이 풍성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서 “그 열기가 무엇인가? 우리도 그것을 좀 알았으면, 그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났으면”하고 말하고 싶은 소원을 일으키는 어떤 것을 이미 보았고 느꼈을 거라고 믿습니다. 뿐 아니라 우리는 그것을 느끼되 하나님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고, 이 위대한 구원을 그러한 방식으로 베풀어주시기를 간청할 정도로 느끼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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