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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오경/창세기

[창세기 강해] 1:6-13 둘째 날과 셋째 날의 창조

by 파피루스 2018.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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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1:6-13 둘째 날과 셋째 날의 창조

 

[성경 본문]

 

6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9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1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강해]

 

첫째 날은 모든 날의 원형이다. 말씀하시고 그대로 이루어진다. ‘이르시되’-‘그대로 되니라는 모든 날에 반복된다. 말씀이 곧 존재임을 드러내는 확연한 표현이다. 이제 둘째 날과 셋째 날을 함께 살펴보자.

 

둘째 날

 

둘째 날은 궁창(穹蒼) 즉 공간(라키아)을 만드신다. 공간은 물의 분리로 인해 일어난 결과이다. ‘나뉘다는 표현을 두 번(6.7) 사용하여 공간이 목적이 아니라 물의 나뉨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 말한다. ‘라키아라카-(עָקַר)’에서 왔다. 월튼은 라키아라는 단어가 P. Seely의 주장을 통해 견고한 돔으로 인식했다고 주장한다.

 

하늘의 견고성에 관해서 역사적 정황을 살펴보면 고대 근동을 포함한 세계 모든 지역의 모든 민족이 역사의 시작부터 주후 200년까지(그리고 그 후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민족이) 하늘 즉 창공이 단단하다고 믿었다.”

 

신화적 관점에서 근접한 월튼의 주장은 지금까지 있어온 고대근동과 전 세계적 하늘에 대한 상식적인 인식이다. 실제로 창세기의 하늘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는 적지 않은 난제다. 창세기 1장에 드러나 분명한 의도는 하늘까지도 하나님께서 창조했다는 사실을 인식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하늘의 개념이 이집트 여신 누트와 동일하게 닮아 있기 때문이다. 이집트인들을 하늘 신이 따로 존재하지만, 이스라엘은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엄숙한 선언과도 같은 것이다. ‘라카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발로 밟든지 손으로 두들긴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것은 창조가 하나님의 손으로 지어진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6절과 7절은 반복이다. 6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7절은 그대로 된다. 8절은 창조된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이다. 선언은 곧 사명이며, 사역이다. 궁창을 하늘(샤마임, 정관사 하가 없다)’이라 부르신다. 여기서는 하샤마임과 샤마임을 논외로 하자. 그러나 분명히 둘은 서로 다른 하늘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제 이후에 일어나는 사건들은 라키아와 연관을 맺는다. 월튼은 라키아에 대한 설명이 구조가 아니라 기능을 전달하는데 있다고 말한다.

 

셋째 날

 

둘째 날과 셋째 날은 엄밀하게 창조된 것이 없다. 둘째 날은 물의 나뉨으로 궁창(라키아)가 생겨났고, 이제 셋째 날은 물을 가름으로 물속에서 땅(야바샤)를 불러낸다. 여기서도 동일하게 드러나라-그대로 되니라패턴이 반복된다.

 

모든 창조 사역이 구속사적이지만 셋째 날은 특히 그렇다. 물을 한 곳에 모이게 하신 후 뭍이 드러나라명하신다. 그러나 이곳에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구절이 등장한다.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인다는 표현이다. 이곳에 표현된 은 정확하게 1절에서 사용된 그 하늘들(하샤마임)’이다. 고민 없이 받는다면 궁창 아래의 물이 될 것이다. 어느 주석도 이 부분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문제는 물이 모인다는 표현이다. 이것은 이후에 일어날 홍수 사건을 연상시킨다. 고든 웬함은 이렇게 말한다.

 

분리라는 위대한 행위가 끝났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나타났다. 좋았더라 홍수로 인해 피조 세계에 세워진 경계들이 침범되었으며 사망과 혼돈이 돌아오게 되었다.”

 

웬함은 셋째 날의 사역을 통해 육지가 드러난 사건은 언제든지 다시 물 속으로 땅이 가라 앉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웬함은 이 부분에서 렘 5:22을 통해 이것을 강조한다. 바다는 언제든지 육지를 삼키려 한다. 단지 하나님께서 그것을 막으시는 것이다.

 

5:2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한계를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거세게 이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

 

은 일반적인 땅이 아닌 마른 땅이다. 1절에서는 에레츠가 사용되었지만 9절에서는 야바샤가 사용된다. 야바샤는 마른 땅이란 뜻이다. 노아가 내보낸 까마귀가 찾았던 ’(8:7)이며,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가리키자 바다가 입을 벌려 내 놓은 땅(14:16)이다. 홍해 도하 사건은 다시 여호수아에 의해 요단강 도하사건으로 계승된다. 이곳에서도 동일하게 야바샤’(4:22)이 사용된다.

 

창세기의 창조는 에덴동산을 향한다. 마치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정성을 다해 준비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사람을 맞이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준비해 가신다. 이제 마른 땅이 준비되었으니 다음 사역으로 넘어간다. 셋째 날의 마지막 사역은 채소와 나무를 만드는 일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채소와 나무가 모두 씨(제라)를 맺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씨를 맺지 않는 채소와 나무는 많다. 그럼에도 굳이 씨를 언급한 이유가 뭘까? ‘내라는 동사는 히필형으로 능동적 상태를 뜻한다. 필자의 견해가 극단적일지 모르지만 이 단어는 구속사적으로 읽어야 한다. ‘(제라)’는 창세기 3:15에서 다시 후손(제라)’로 번역되어 등장한다. 이것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땅을 약속하실 때 사용하신 자손 역시 제라이다. [제라는 후에 다시 <히브리어 동사 용례>에서 다루기로 하고 넘어가자.]

 

결론

 

셋째 날은 첫 창조의 완성이다. 육일의 창조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1-3일은 준비과정이며, 4-6을 이미 준비된 것들을 채워간다. 마지막 7일은 완성이다. 완성은 그침이 아니라 이전의 육일을 총체적으로 완성하는 안식을 창조하신다. 예수는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며 안식의 개념을 재정의 하신다. 셋째 날은 복과 저주를 동시에 암시한다. 뭍은 원래 물속에 있었고 언제든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단지 하나님께서 막으실 뿐이다. 이것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물이 없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겨들어야할 것은 하나님은 물의 주인이시며, 물을 통제하신다는 점이다. 이것은 모세의 반석을 깨는 기적을 통해 증명될 것이다. 물은 복이며 동시에 저주(심판)의 도구이다.

 

씨는 희망이다. 창세기 3장과 연결시킨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놓지 않으신다는 하나님의 헤세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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